강상헌의 자서전학교...당신의 숨결 세상 비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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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두거라’ 농훈 김성훈 교수(환경정의 이사장, 전 상지대 총장)가 최근 펴낸 책 이름이다.

 어렸을 적 어머니가 들려주신 말씀을 가슴에 새겼다가 이제 자신 삶의 평생의 뜻과 버무려 세상에 돌려주었다.
 
 그는 농업의 큰 본디[大本]된 뜻과 생명의 힘을 쉬지 않고 농사지어왔다.

 거의 모두가 어려웠던 초등학교 시절, 7남매와 6.25전쟁으로 어버이 잃은 사촌 4남매 등 아이만 11명인 대가족 앞에 내놓은 삶은 고구마 한 소쿠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이 났다. 제 때 챙기지 못한 식구(食口)는 배를 곯아야 했고, 한 편에선 급히 먹느라 목이 메어 곤욕을 치르는 소동이 빚어졌다. 그 때 어머니의 말씀이 “얘들아,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두거라.”였다.

 어찌 먹는 문제만일까? 농훈은 이 책 속의 같은 제목의 글에서 이 뜻을 ‘나누는 삶’으로 풀었다. 또 감투(지위)를 쓰는 사람의 마음자리에도 이렇게 이 뜻을 앉혔다. 

 ‘남을 생각하고 함께 나누는 삶 치고, 먼저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는데서 시작하지 않는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어떤 자리(책임)를 맡았을 때는 미리 그만둘 때를 생각하고, 날마다 마음가짐을 잡도리해야 한다.’

 함께 사는 세상의 아름다운 뜻으로 뿐만 아니라 세상에 처하는 비책(秘策)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또 날씬해지려는 열망의 숙녀들에게 최적의 다이어트 방법일 것이며, 성인병을 벗고 싶은 중년들에게도 좌우명이 되어야 할 말씀이다.

 착한 먹거리를 필요한 양 만큼만 먹는 절제의 미덕은 당신을 건강하게 하고 병원비를 줄여줄 터다. 그 뿐인가? 환경운동에 나선 미국 정치가 엘 고어가 ‘기후변화’를 들어 제기한 명제 ‘불편한 진실’에 대응하는 가장 쉬운 해결책이다.

 ‘오래된 미래’를 아는가? 풍요롭지는 않지만 아무도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고, 친밀한 공동체적 삶 속에서 여성들과 아이들과 노인들이 존경받는 사회, 빈약한 자원에 기후 엄혹한 히말라야 고원 라다크 사람들의 검소한 생활양식에서 ‘인류의 미래를 구원할 진실’을 본 생태운동가 헬레나 호지의 귀한 뜻이다. 그러나 과문(寡聞)의 탓이겠으되,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두거라’의 뜻과 다른 바를 필자는 ‘오래된 미래’에서 찾지 못 한다.

 기후변화의 그림자가 인류의 앞날에 드리워지고 있다. ‘침묵의 봄’은 예고편이었을 뿐이다. 해수면 상승과 빙하가 녹아내리는 상황을 본다. 오징어가 제 사는 곳을 서해로 옮겼다. 가뭄으로 사람들의 목이 타고 산불이 계속된다. 고온과 저온현상이 지구촌 여기저기를 짓누른다. 이에 적응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어떻게 변하고 있을까?

 다만 예고된 재앙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눈을 감았다. ‘어리석은 위정자’를 삿대질하여 면피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아버지 부시가 어떻고, 아들 부시가 또 그랬고, MB는 또 어떻고 하는 한가한 얘기만으로 ‘나’는 어찌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으랴?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두거라’의 뜻을 진작 새겼어야 했다. 정치인들의 무지함은 이런 ‘나’들의 무절제에 토대를 둔 것 아니던가?

 국제적인 경제위기 때문에 ‘정의’는 잠시 선반에 올려 두자고하는 이도 있다. 이 경제위기가 자연을 약탈하는 개발의 무한질주에서 비롯된 것임을 외면하고, 이를 치유한다며 또 다른 ‘질주’를 벌이자고도 한다. 심지어는 ‘삽질’에 녹색 물감을 덧입히는 사기와 협잡이 횡행한다. ‘나’를 경계하지 않았기에 결국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하지 않던가. 어려운 상황을 당했을 때 좀 더 여유를 갖고 상황을 둘러 본 다음에 제대로 일어서야 한다는 뜻이겠다. 지금의 경제위기를 지구촌 전체가 공존의 터전을 마련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두거라’라는 지혜의 다방면의 성찰과 실천만으로 이는 가능하다. 현실성 없는 이상론에 불과하다고? 스스로를 바룰 생각 없이 ‘남’이,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탁월한 정책이나 산더미 예산도 다 공염불이다.

 ‘그린뉴딜’이 살 길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듯 그린은 석유 대신 바람과 햇빛으로 전기를 얻는 공장을 세우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본질에 대한 바른 생각의 회복과 이를 토대로 한 실천이 그린일 터다. 근검과 절약만으로도 발전소 서너 개가 생산하는 전기를 얻을 수 있다고 알려주는 TV의 캠페인은 ‘허망한 정치선동’이 아니다.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두거라’는 우리의 삶이 잉태한 귀한 진리다. ‘나’부터 시작하여, 모든 이가 이를 기꺼워하고 몸소 실천하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사랑의 혁명’으로 이를 키워 온 세상을 기쁨으로 물결치게 하고 싶지 않는가. <에디터 강상헌>

Posted by 인터뷰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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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5월 최초게재] 여러분이 이 글을 읽을 즈음이면 이미 봄은 저만치 지나가고 있을 것입니다. 초여름의 힘찬 신록(新綠)이 우리에게 또 다른 활력을 주고 있을 터이지요.

 이미 이야기 재료로서의 가치는 좀 떨어졌을 터이지만, 선거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요. ‘여러분의 정의(正義)’와 얼마나 합치되었을지 궁금합니다. 섭리에 보다 가까이 다가갔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되기를 선거를 코앞에 둔 지금 간절히 희망하고 있습니다.

 한해 중 가장 아름답다는 4월초, 백목련 자목련 흐드러진 창밖에 연신 눈길을 빼앗기며 여러분께 소식을 전합니다.

 이때쯤이면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있지요. 전남 구례에서 남쪽을 향해, 경남 하동에 이르는 섬진강 풍경에 풍덩 빠져보고 싶은 것입니다. 가보신 분들 많으실 줄 압니다. 그 강가 꽃길, 매화 벚꽃 모두 꿈결이랄 밖에요. 또 새싹은 꽃보다 더 간절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안깁니다.

 그 위를 나는 나비를 보면 장자(莊子)의 문구가 저절로 떠오릅니다. 호접지몽(胡蝶之夢), 나비의 꿈이라던가요? 내가 나비인 듯, 나비가 나인 듯...

 몇 해 전 그 길을 가다 들렀던 기품 넘치는 한옥 생각이 났습니다. 구례군 토지면의 운조루(雲鳥樓)였습니다. 구름과 새를 보는 누각이라는 뜻일까요? 오래전에 지어진 부유한 선비의 집입니다.

 곳간에 큰 쌀뒤주(사진)가 있었지요. 거기에 적힌 한자가 생각났습니다. 他人能解(타인능해), (식구가 아닌) 다른 사람도 쌀뒤주 덮개를 열 수 있다는 말. 식량이 아쉬운 이는 언제나 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덕목을 꼽는 지덕체(智德體)란 말의 가운데 글자인 ‘덕’을, 남에게 이익을 준다는 뜻으로 풀어봅니다. 어질다는, 그러면서도 크다는 뜻도 들어있지요. 말 그대로 덕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그 선비의 덕성스러움에 새삼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가 가졌던, 지금도 오롯이 지니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마음이 아닌가 합니다. 남을 배려한다는, 어려운 이웃을 애달파한다는 그 낙낙한 착함은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결코 잃을 수 없는 우리의 덕목입니다. 인심이라고도 하나요? 

 남을 배려한다는 말에서의 ‘남’의 뜻을 ‘나를 뺀 우주의 모든 것’으로 정의해봅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라는 비유적 표현으로도 도대체 가늠해보기 어려운, 저편 우주 끝까지를 ‘남’의 범위에 넣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 ‘덕’은 참으로 크군요.

 한 점 지구를 품은 태양계의 큰 틀인 은하계의 별의 수가 온 바닷가 모래알 모두를 헤아린 수보다 훨씬 많다는 막막한 우주의 크기와,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그 우주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속의 ‘나’를 챙겨봅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미세한 존재인지, 우리 인생 한 뼘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참 황당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입니다. 본질이지요.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명상록>(팡세)에서 인간이 이 같은 ‘본질’을 알기에 그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가 우주보다 위대하다고 했다지요? 위대한 명상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곤 하는 영원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요. 인류의 ‘위대한’ 업적인 문명이, 이 거대한 우주의 크기와 영겁(永劫)이라는 시간의 단위 속에서 드러내는 부조리하고 불가해(不可解)한 실상을 우리는 애써 외면만 할 것인가요?

 윤동주의 아름다운 시에 나오는 ‘살아있는 모든 것’이라는 생명의 개념은, 실은 미처 우주의 운행까지를 염두에 두지 못한 편협(偏狹)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봅니다. 가슴 저미도록 슬픈 아름다움을 내뿜는 그 칼칼한 시어(詩語)들이 길가 못생긴 돌멩이의 뜻, 가없는 우주의 본디까지를 지녔다면 더 기쁘지 않았겠느냐는 욕심이지요.

 그러나 아직도 인간과 인간사회를 ‘우주의 중심’으로 여기는 비논리적인 해석방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지구의 여러 시스템들, 특히 국가들은 그나마 문명이 깨달은 그 ‘덕’이라는 지혜를 일부러 모르는 체 합니다.

 현대사에서 미국이나 일본이 거푸 내지르는 ‘덕 없음’의 모습들을 새겨 봅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이 아직 ‘좋은 나라’의 척도(尺度)가 되어야하는 야만적인 시대를 우리 지구는 겪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단지 폭력 아닌가요? 그 곳은 철학도, 천문학도 없는 몽매한 곳일까요? 

 특히 석유를 위해, ‘정의’라는 거짓 깃발을 세우고, 그 무서운 미사일로 이민족을 학살하는 미국의 모습에서 우리는 더할 수 없는 슬픔을 느낍니다. 우주를 한 뼘 삼고, 영원을 한 순간 삼아 현상과 사물을 바라본다면 그 본질이 더 잘 보일까요? ‘나’를 빼고 헤아려야 사물의 본성이 드러나는 법이라지요?

 미국에 항거하는 이슬람의 처절한 몸짓을 ‘테러’라고 미국의 교본대로 해석해야 하는 현실이 또한 슬프고, 그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이라크 땅에 무기를 쥔 군대를 보내야하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현실이 한심한 것이지요.

 당당한 저 베트남 사람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더 철저히 부끄러워야 합니다. 참 위대한 국민들입니다. 프랑스에도, 미국에도, 중국에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지요.

 그들은 우리를 용서했을까요? 우리 같으면 어떻겠습니까? 미국의 이익을 위해 우리는 그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댔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젊은 군인들을 사지(死地)로 내몰며 ‘조국이 부른다’고 사기를 쳤습니다. 그 역사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을까요? 베트남의 현재를 보듯 이라크의 10년 후, 20년 후를 생각해볼 수는 없는지요? 우리나라가 끝내 ‘조폭과 어울리는 불량배 국가’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베트남의 그들이 지금 우리에게 준 ‘반성의 기회’에 해야 할 일이 많을 줄 압니다. 물심(物心) 양면으로 말이지요. 좀 더 정중하고 겸손하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사죄해야하는 것이지요. 정직하고 친절한 친구로 인정받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얘기가 본류에서 벗어났습니다. 예를 들자면 꽃을 화두로 이런 ‘불온한’ 생각까지도 가능하다는 얘깁니다. 좋은 사람, 좋은 사회, 좋은 나라가 되는 좋은 방법은 어떤 것 일지요?

 속잎 감춘 초목 꽃 얼굴로 산천 흔드는, 순수의 열망 터져 오르는 봄날은 정작 생명의 참 뜻에 가슴으로 다가서야 하는 때입니다.

 ‘타인능해’의 착함은 이 같은 생명의 참 모습을 구하는 구체적인 발현(發顯)이겠지요. 아니면 우주 운행의 천기(天機)를 명상하는 방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같은 생각의 계기를 만들어준 옛 선비의 착한 지혜에 감사합니다. 어찌 부유함만으로, 또 뜻만으로 가능했을까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봅니다. 비록 그 이쁘디 이쁜 덕(德) 다 가질 수는 없다고 치더라도, 흉내라도 낼 수 있기를 열심히 궁리하고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봄날 꽃 이파리 한 장에서도 생명의 울림을 몸소 느낄 수 있기를 가난한 마음으로 갈구합니다. 참 아름다운 봄날입니다. 선생님도 이를 닮아 크게 아름다우십시오. <에디터 강상헌>

Posted by 인터뷰선데이

 둠벙 위쪽 풀 많은 개울가 그늘에 매어두면 소는 한참을 먹다 고개를 들고 ‘음메에’ 소리를 합니다. 큰 눈 껌벅이며 천천히 히죽 웃습니다. 착한 표정입니다. 정지용 시인은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라며 ‘운다’고 그렸지만, 필자 기억으로는 웃는 것입니다.

 소치는 아이가 막대기로 화풀이나 심심풀이 삼아 때리거나 하지 않으면 소는 울지 않습니다. ‘음메에’는 새끼를 부르거나 자기들끼리 의사표시를 하는 수단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기분이 좋다는 뜻이고, 웃음이지요. 석양을 메아리치던 이 고운 소리, 요즘 들판에서는 들을 수 없습니다.

 ‘소가 웃을 일’이란 말을 아무개가 했다는 글이 신문에 많이 실립니다. 황당하여 말이 안 되는 일을 겪을 때 흔히 쓰는 말인 듯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말을 쓰는 분들이 소의 웃음을 본 적이 있을까요? 웅숭깊은 느낌까지 주는 소의 웃음이 이렇게 경박한 비유로 활용될 이유가 없습니다. 몰라서, 본 적이 없어서 그런 말을 함부로 쓰는 것이겠지요.

 예전에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 부르기도 했지요. ‘소까지 팔아야’ 보냈지요. 지금은 ‘똥값’이라지만 그 때 소는 한 재산 했습니다. 큰 아들 ‘합격’ 소식에 아버지는 외양간 문 걸어 잠그고 한참 있다가 눈이 퉁퉁 부어 나오셨지요. ‘머슴’ 역할까지 듬직했던, 식구나 다름없는 소와 이별이 쉬웠을까요? 팔려가며 소도 울었답니다. 우리와 소의 관계는 이렇듯 살뜰했습니다.

 소의 우직한 품성에 주눅 든 일부 심성 얄팍한 사람들이 ‘쇠 귀에 경 읽기’니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다’ 따위의 말로 소를 깎아내리려고 했으되, ‘황소고집’으로 소는 제 자리를 지킵니다. 대체 어떤 소가 인간의 경 소리 듣기을 청했으며, 쥐 잡고자 뒷걸음을 쳤습니까? 인간의 오해이자 억지지요, ‘소가 웃을 일’처럼 말입니다.

 새해 2009년 기축(己丑)년 소띠 해. 근면(勤勉)과 유유자적(悠悠自適)의 미덕으로 인간과 더불어 살아온 소의 본성을 지닌 해입니다.

 미국 섬기는 사대(事大)의 논리를 ‘경제’로 포장하여 하늘같은 국민을 강박(强迫)한 광우병사태로 상처를 입은 소, 미국산 사료 값 폭등으로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소, 송아지 값이 등심 1인분보다 못하다고 화제가 되는 소, 소의 굴욕이 처연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돌고 도는 것, 소의 본성을 잊거나 잃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새해 아침입니다.

 소는 벽사(辟邪)와 기복(祈福), 요사스러움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영험(靈驗)의 동물로 오랜 세월 우리 민속에 새겨져 왔지요. 아예 풍요와 힘을 상징하는 농사의 신(神)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신석기시대 이래 가축으로 소를 길렀고, 제사를 지낼 때 제의용(祭儀用) 또는 순장용(旬葬用)으로 활용했다는 기록이 고대 문서에서 발견됩니다. 소를 잡아 발굽 모양을 보고 길흉(吉凶) 또는 싸움의 승패(勝敗)를 점치기 위한 중요한 도구이기도 하였지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소는 달구지를 끌거나 한가로이 여물을 먹는 모습으로, 또 은하(銀河)와 견우직녀 이야기를 그린 그림에서 견우가 끄는 동물로 등장하지요. 소를 끈다는 견우(牽牛)와 베를 짜는 직녀(織女)의 이름이 농사 설화의 한 상징이지요. 신라의 흙 인형 토우(土偶) 중에는 물소와 같은 큰 뿔을 가진 소도 있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왕 5년(서기 84년)에 ‘고타군수가 푸른 소(靑牛)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푸른 소는 중국 문헌에 노자(老子)가 타고 다니는 동물로 묘사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한 언론인은 썼더군요. 소가 신선과 함께 선계(仙界)를 노니는 동물이라는 상징이지요.

 그 후로도 소는 우직하고 순박하며 여유로운 천성으로 선비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지요. 소를 소재로 한 시문(詩文)이나 그림, 고사가 많은 점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김제 이경윤 김식 윤두서 조영석 김두량 김홍도 최북 등의 화가가 소를 잘 그린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오래된 그림 중 소 등을 탄 사람을 그림 김식 최북 등의 기우도(騎牛圖)는 소와 인간의 친밀감과 함께 세사(世事)나 권력에 민감하게 굴거나 졸속하지 않고 여유롭게 노닌다는 도사나 선비의 정신을 보여줍니다.

 도교에서의 소의 유유자적 이미지처럼 유교에서의 소의 이미지는 의(義)입니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서 호랑이와 싸워 주인을 구하고 죽은 소 이야기, 의로운 소의 무덤 의우총(義牛塚)에 관한 전설 등도 이러한 유교적 배경 속에서 전해져 왔다고 볼 수 있지요.

 불교에서는 사람의 진면목을 소에 비유하였습니다. 절집 외벽에서 흔히 보는 십우도(十牛圖) 심우도(尋牛圖)는 선을 닦아 마음을 수련하는 순서를 표현한 것입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만년에 그의 자택을 심우장(尋牛莊)라고 한 것도 이런 뜻이지요.

 국립민속박물관 천진기 민속연구과장은 “소의 특성과 농경문화 중심의 우리 민족과의 관계는 전국 각지에 소와 관련한 다양한 민속의 모형을 구축했다.”고 설명합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이 같은 다양성과 역사성은 지구촌에 영감을 줄 콘텐츠로서의 ‘우리 소’의 기능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생명의 이치’보다 ‘이끗의 논리’를 귀하다 하는 무리들 때문에 상처 입은 우공(牛公)이 소의 해, 새해에는 화를 막고 복을 부르는 힘센 존재로 다시 우뚝 서기를 기원합니다. 소의 본성처럼 여유와 평화를 누리시기 바라며 원로 시사만화가 안백룡 화백의 새해 축하 그림을 여러분에게 선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에디터 강상헌> [그림 안백룡 화백]

Posted by 인터뷰선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