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헌의 자서전학교...당신의 숨결 세상 비추다

 [2004년 3월 1일 최초게재] ‘웰빙(well-being)'이란 낮선 말이 요즘 문득 유행어가 되어 있습니다. 신문의 기사에서도, 그 아래 광고에서도 마치 이 단어는 우리와 오래 인연이 있었던 듯, 당당합니다.

 ‘잘 먹고 잘 살기’라고 한번 뜻을 매겨 볼까요? 신문이나 방송이 말하는 ‘웰빙’은 딱 그 정도가 어울리는 것 같네요. ‘여유 있는 삶을 누릴 자격(또는 돈)이 있는 사람은(또는 사람만) 건강하고 즐겁게 살면 그만’이라는 식의 좀 심술궂은, 이기적인 어투로 들리기까지 합니다.

 신문 방송 등 대중매체가, 또 기업들이 이 단어에 기대는 끈끈한 장사속이 이 단어의 원래 뜻을 많이 오염시켰다고 볼 수 있겠지요.

 “웰빙인지 나발인지, 우리 서민들과는 상관없는 것 아니냐!”는 투의 볼멘소리도 많이 들립니다. 와인에, 로봇 청소기에, 무병장수 아파트에, 비데에, 에어클리너에, 도대체 신문이나 방송에서 웰빙이라고 내세우는 것들은 우리 모두 근검절약하던 이제까지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비싼 것들뿐이더라 하는 삿대질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좋은 생활로 이뤄가는 착한 삶’ 쯤으로 이해되어야 할 웰빙이 장사속의 맨 앞에 선 깃발이 되어 우리에게 또 다른 스트레스를 줍니다. 그러나, 우리 용기를 내십시다. ‘착한 마음’이 정녕 웰빙일 것입니다. 이웃이 불행하면 어찌 나 혼자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일전에 TV 대담 프로그램에서 “노화(老化)는 생존을 위한 정상적 생리변화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갑자기 눈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지요. 늙는 것은 ‘신체의 기능 저하를 이르는 병’이라는 상당수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그 나이에 가장 적당한 상태로 변하는 것이 늙는 것이라면 웰빙이던, 건강이던 생활과 생활의 방식에 관한 생각을 바꿔야할 전기(轉機)가 되는 것이지요. 아직은 이것도 3백여 가지나 되는 노화학설 중 하나인데, 한국노화학회장이면서 서울대 의대 교수(생화학)인 박상철 교수의 새로운 주장입니다.

 교육방송에서 새해 들어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간에 ‘지식의 최전선’이라는 제목의 대담 프로그램을 내보냅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이 ‘짱’인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임경순 교수(과학사)가 고정 출연자이고 매번 대담 상대가 바뀌더군요.

 ‘생명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아름다운 이름의 책을 내기도 했다는 의학자가 출연한다는 예고를 보고 일부러 졸음을 참고 경청했습니다. ‘노화’가 주제였습니다.

 “역시 젊은 세포가 강하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이상의 강한 자극에는 오히려 젊은 세포가 죽고 늙은 세포는 살아남더군요.”

 놀랍지 않습니까? 노화는 최적화(最適化)를 위한, 생명의 생존 방법이라며 자신 있는 어투로 시청자에게 미소를 건네는 박상철 교수의 이 얘기는 생명과 생명현상을 ‘과학’과 ‘실증(實證)’의 잣대로만 저울질하지 말라고 경고했던 1백년전 무렵의 생의 철학자들의 주장을 생각나게 해줬습니다.

 쇼펜하우어 딜타이 니체 베르그송 등을 ‘생(生)의 철학자’라고 합니다. 특히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 ‘생명의 비약(飛躍)’이라는 개념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실험실적 분석만으로 ‘생명’의 본질이 어찌 드러나겠습니까? 설익은 지식체계로 생명의 귀함을 훼손하지 말라던 이런 철학자들의 ‘철학’은 새삼 우리에게 인문학의 존재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21세기 한국의 권위 있는 의학자는 이제 이런 철학을 실험실적 검증까지 거쳐, 의학적 접근방법으로 설명합니다. 한국과 외국의 오래 산 이들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면서 박 교수는 예언자적인 풍모마저 풍겼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에게 오히려 질문을 던집니다.

 노화가 병(病)이냐, 아니면 생리적 현상이냐? 늙으면 우리는 꼭 죽어야 하느냐? 우리 신체(장기)의 기능회복은 가능하냐?

 박 교수는 한국의 백세인(나이 1백세 이상 어른)들의 생활 방식으로 답을 제시합니다. 첫째, 그들은 부지런하며 일을 한다. 둘째 그들은 음식이건 기호품이건 절제한다. 셋째 그들은 이웃과 잘 어울린다.

 이것이 ‘잘 늙는 방법’이라면 동시에 ‘잘 사는 철학’이기도 할 것입니다. 오래 사는 이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자극도 부드럽게 바꿔버리는 ‘지혜의 인자(因子)’가 있다는 얘기도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이었지요. 오래 잘 사는 더 구체적인 방법을 구하는 이들은 박 교수의 저서나 박 교수 관련 뉴스에 관심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눈치가 빠른 분들은 이쯤에서 필자의 속셈을 읽으셨을 것입니다. 생명에 관한 진지한 통찰없는 웰빙은 무늬만 웰빙이지, 실은 장사속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생명에 관한 생각은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는 영원(永遠)의 시간과 우주적인 영역을 시공간적 배경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만, 필자도 TV의 ‘생로병사의 비밀’이라는 프로그램을 자주 봅니다.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을 보면서 때때로 사람의 몸이 우주적이며, 우주보다 더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정교함을 풀어보자면, 우주와도 비길 ‘또 다른 우주’가 사람의 신체라는 것이지요. 놀랍게도 우리 선조들은 이 진리를 ‘사람은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의 철학으로 오래 전에 이미 풀었답니다. 모르셨던가요?

 인체를 비롯한 모든 생명 깃든 것들과 이들을 품는 터전인 천체(天體)에 하나라도 이유 없는 것이 있겠습니까? 또 무생물이라고는 하지만 돌맹이 하나, 실개천 하나까지도 괜히 놓였겠습니까? 생에 대한 외경(畏敬)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존경한다는 것이지요.

 병든 애완견이 버려져 산을 이룬다는 뉴스가 나옵니다. 어린 여중생이 차가운 주검으로 산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은 오래 가슴 찢을 얘기군요.

 테러가 지금도 지구촌 이곳저곳을 얼룩지게 합니다. 암(癌)이란 병이 언제부터 이렇게 우리 주변의 흔한 병이 됐을까요? 우리 인류 ‘웰빙’의 현재 모습이지요. 그리고 그 미래가 그다지 밝은 것도 아닙니다.

 남극과 북극의 빙산이 녹아내려 바닷물 수위가 높아지는데, 우리가 전기를 많이 쓰고 자동차를 많이 굴렸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보셨나요?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 후손이 입을 재앙(災殃)을 우리는 애써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아니 그 재앙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각종 기후현상의 ‘반란’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웰빙을 풍요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이웃과 후손의 기회와 안녕(安寧)를 빼앗는 것은 배드빙(bad-being)일 터입니다. 그리고 ‘그런 웰빙’은 곧 여러 가지 모습으로 부머랭처럼 ‘나’를 공격할 것입니다. 돈을 더 쓰게 하고, 에너지를 더 사용하도록 하는 ‘웰빙’의 진짜 모습이지요. 차라리 없는 게 낫겠군요.

 산업화로 파편화된 인간들의 투쟁의 정글인 우리네 삶에서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상생(相生)의 지혜는 이제 찾아보기 힘든 뜻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봄, 얼음장 밑으로부터 졸졸거리는 물의 흐름이 들려주는 희망의 소리처럼 우리는 우리 사회가 ‘아름다운 마음’을 회복할 것을 믿습니다. 제 정신을 되찾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마음은 항상 실천을 동반하는 것임도 다시 확인합니다.

 이것이 정녕 웰빙이고, ‘오래 잘 사는 길’일 것입니다. 부디 웰빙하십시오. <에디터 강상헌>

Posted by 인터뷰선데이